모명재에서 만난 두사충과 이순신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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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 명나라 장수 두사충을 기리다

대구 수성구 만촌역 인근 형제봉 가는 길목에 위치한 모명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가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을 기리는 재실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귀화한 두사충은 군공보다는 풍수지리의 대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두사충과 이순신, 깊은 우정의 흔적

모명재 입구에는 이순신 장군과 두사충 장수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제독 이여송 휘하에서 수륙지획주사라는 직책을 맡아 지형을 살피고 진지를 선정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조선군과 긴밀히 협력하며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고향으로 돌아갔던 두사충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아들 두산, 두일건과 매부 진린 도독과 함께 다시 출진했습니다. 전란이 끝난 뒤 두사충과 두 아들은 조선에 귀화하였고, 조정에서는 대구 시내 중앙공원(현 경상감영공원) 일대의 땅을 하사했습니다. 이후 두사충은 자신의 땅을 내어주고 계산동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대명동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두보 시인의 21대손, 이순신과의 우정

두사충은 시인 두보의 21대손으로, 이순신 장군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이순신은 두사충에게 '복정두복야'라는 시를 지어 우정을 표현했는데, 시에는 "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 하고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라는 구절이 담겨 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더욱 깊어졌습니다.

모명재의 건축과 역사적 가치

모명재는 두릉두씨 문중에서 두사충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재실로, 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대구 지역 재실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겹처마 팔작 기와집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입니다. 내부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이 있습니다.

1912년 경산 객사에서 옮겨온 재목으로 지어졌으며, 1966년 중수되었습니다. 최근 재정비 사업을 통해 새롭게 단장되어 많은 내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두사충의 묘와 무인석

모명재 뒤편에는 두사충 장수와 두한필 묘가 위치해 있습니다. 해설사의 안내로 도착한 묘소는 햇살이 잘 드는 야트막한 산길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인석 한 쌍이 장군의 위엄을 상징하듯 묘를 지키고 있습니다. 무인석은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에서도 볼 수 있는 희귀한 석상입니다.

묘소 주변은 조용한 산새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많은 시민들이 맨발 걷기를 하며 이순신 장군과 두사충 장군의 우정을 기리고 있습니다.

두사충, 조선에 남아 진정한 우정을 선택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두사충은 아내와 생이별을 하였지만, 조선에 남아 귀화하며 이순신 장군과 돈독한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명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음에도 조선에 정착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두사충의 후손들은 모명재에서 그의 재를 올리고 있으며, 두사충은 단순한 명나라 장수가 아닌 이순신 장군과의 깊은 우정을 나눈 외국인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모명재 위치 안내

모명재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3에 위치해 있으며, 만촌역과 인접해 접근성이 뛰어납니다. 이곳은 역사와 우정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명재에서 만난 두사충과 이순신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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